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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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82장과 文靖公 雪齋 鄭可臣 先生

龍飛御天歌 第82章

중시조 문정공 설재 가신 선생의 사적이 등재되어 창재된 용비어천가 제82장의 원문을 후손인 서예가 金草 鄭侊柱가 揮毫한 작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 82 장

혀근 션 보시고 御座(어좌)애 니르시니 敬儒之心(경유지심)이 엇더시니

늘근 션 보시고 禮貌(예모)로 르시니 右文之德(우문지덕)이 엇더시니

 

(원 나라 세조는) 작은 선비를 보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니, 그 선비를 공경하는 마음이 어떠하시니?

(이 태조는) 늙은 선비를 보시고 예의 갖춘 태도로 꿇어 앉으시니, 그 학문을 높이는 덕이 어떠하시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 세종(世宗) 때 세종의 명에 따라 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이 동왕 27년(1445) 4월에 본문(本文)인 가시(歌詩)를 다 만들었는데, 세종대왕이 이를 두루 살펴보신 뒤 이름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 명명하시고, 다시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신영손(辛永孫)들에게 주해(註解)를 덧붙이게 하여 동왕 29년(1447) 2월에 완성한 것을 발간 동년 10월 16일 군신(群臣)에게 내려 준 책임.

내용은 태조(太祖)의 고조(高祖) 목조(穆祖)가 터전을 닦음으로부터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태종(太宗) 등 6대 조종(祖宗) 용잠(龍潛) 때의 공덕(功德)을 노래하고, 화가위국(化家爲國)의 극난함을 들어 후대 임금들의 거울을 삼게 하는 동시에 고려의 실덕(失德)과 조선의 성덕(盛德)을 말하며, 고려를 쓰러뜨리고 조선을 건국(建國)한 것은 대명(大命)으로 혁명함이요, 신하로서 반역(反逆)함이 아니라 하는 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읊은 1백 25 장(章)의 한글 (歌詞)와 한시(漢詩)로 대역(對譯)한 역시(譯詩)를 원문(原文)으로 하여 각장(各章)마다 한문 설명인 주해(註解)를 덧붙여서 만든 것임.

 

 문정공(文靖公)의 인품(人品)과 풍모(風貌)

고려사의 열전은 그 시대를 풍미(風靡)한 인물들의 업적과 풍모를 그리고 있는데 상당히 알려진 명현들도 염치없는 면모를 꽤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문정공(文靖公)만은 어느 기록에서나 정평(正評) 뿐이다. 그것은 공의 고매한 인품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남달랐기 때문이리라. 그 같은 공의 픙모를 단적으로 들어내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왕이 경연(經筵)에서 신하들과 잡담을 나누다 그것을 그치게 하는데 정학사(鄭學士)가 오면 야단 맞는다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알만 하다. 후에 조선조(朝鮮朝)의 신성화와 합리화를 위해서 세종(世宗)의 육조(六祖)에 대한 공적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데 그 82장은 문정공(文靖公)을 예로든 노래이다.

이 장(章)에서 혀근(작은) 선비는 작은 나라의 사신인 문정공(文靖公)이다. 원(元)의 세조(世祖)가 공을 어좌(御座)에서 일어나 맞을 만큼 큰 유자(儒者)로 대접했다는 고사(古事)이다. 이 때 공은 원의 가의대부(嘉義大夫)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제수 받고 그 뒤로 중국이나 국내나 학사(學士)란 호칭이 닉네임처럼 따라 붙게 된다.

늙은 선비는 여말(麗末)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성리학자이다. 그가 공양왕 때 정포은(鄭圃隱) 사건으로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 나자 이성계(李成桂)가 상좌에 모시고 꿇어 앉아 술을 권한 일화이다. 그 때 사람들은 이색(李穡)의 사양치 아니함을 나무랐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간에 두 사람으로 대구(對句)를 이룬 노래는 황제(皇帝)나 왕이나 큰 선비는 잘 모신다는 걸 강조하려는 점이다. 용가는 주로 중국 역대 황제나 유명한 인물들의 행적과 조선의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의 행적들을 대비하는 형식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시대 순으로 펼치고 있다.

여기서 82장의 사실과 시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문정공(文靖公)과 이색(李穡) 이외는 없음을 몇몇 사학자들도 동의하고, 게다가 더더욱 분명한 점은 고려의 국왕이 래조(來朝)한다고 어좌(御座)에서 일어 서 맞을 황제(皇帝)는 없는데, 소국(小國) 그것도 속국(屬國)의 외신(外臣)인 문정공(文靖公)을 그렇게 했다는 고사는 중국의 역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참고]자료검색 및 宗報10號 文靖公의 새로운 사실 발굴에서 引用(思義堂公15世孫 鄭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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