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1991 辛未譜
第二編 屢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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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譜序(癸酉譜 1873年)(구보서 계유보 1873年)

[역문]족보는 史記體(사기체)다.

周官(주관)에 小史(소사)벼슬이 國家(국가)의 記錄(기록)을 맡아 世系(세계)를 整理(정리)하고 昭穆(소목)을 分別(분별)하니, 漢(한)나라에 功臣世家(공신세가)의 年表(년표)가 史記(사기)에 실려 있고 唐初(당초)에 二百九十三姓一六五一家(293성 165일가)의 氏族(씨족)을 뽑아 기록하여 內府(내부)에 소장하라고 命(명)하니 족보가 있게 된 것이 이때에 비롯되었다.

우리나라도 氏閥(씨벌)을 重(중)히 여겨 무릇 大家世族(대가세족)의 爵諡(작시)며 勳號(훈호)며 名節(명절)이며 事業(사업)이 특히 나타나 가히 기록할만한 것을 國史(국사)에 실어 永久(영구)히 傳(전)하여 남겨 不朽(불후)케 하니 비록 족보가 아니더라도 또한 가히 돌아보나 世代(세대)가 멀어지고 子孫(자손)들이 불어나 혹 중간에 무너져 미약해지고 혹 쪼개여 흩어져 살면 一姓(일성)의 親함이로되 갑자기 만나면 路人(로인)과 같은지라 이점으로 족보를 가히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姓(성)마다 各各(각각)족보가 있어 만들어 家史(가사)를 삼으니 이에 祖上(조상)을 높이고 宗家(종가)를 공경하며 이에 親(친)한 이를 두텁게 하고 倫常(윤상)을 두텁게 하며 이에 親疏(친소)와 遠近(원근)과 內外戚(내외척)의 부치를 合(합)하여 하나로 하여 하여금 萬가지나 다르되 하나에 근본함을 알게 하니 진실로 風俗(풍속)을 두텁게 한 것이다.

羅州鄭氏(나주정씨)는 南中(남중)의 望族(망족)이다. 高麗(고려) 忠烈王時(충렬왕시)에 諱(휘) 可臣(가신)이 있으니 官(관)은 中贊(주안)이오 諡號(시호)는 文靖(문정)이니 德業(덕업)과 文章(문장)이 蔚然(울연)하여 儒宗(유종)이 되니 學者(학자)들이 雪齋先生(설재선생)이라 일컬었고 이를 이어 三不義軒(삼불의헌)과 永慕亭(영모정)과 思禮堂(사례당)의 寯望高行(준망고행)과 黙軒(묵헌)과 逸軒(일헌)과 滄洲(창주)와 淸名偉蹟(청명위적)이 邑志(읍지)와 家狀(가장)이며 龍蛇日錄(용사일록)에 다같이 실려있다.

모두 고증이 된다.

舊譜(구보)를 肅宗(숙종) 乙酉年(을유년)(31年 西紀1705)에 作成(작성)하니 世德(세덕)과 派系(파계)와 凡例(범례)는 本孫(본손) 珪(규 )氏(씨)가 만들었고 進士(진사) 彦復(언복) 氏(씨)와 道啓(도계) 氏(씨)같은 분은 序文(서문)과 跋文(발문)을 쓰셨다.

지금으로부터 乙酉年(을윤년)까지는 百六十餘年(백육십여년)이로되 再刊(재간)하여 完成(완성)되니 鄭氏(정씨)의 諸宗(제종)이 佐模(좌모)가 雪齋(설재)의 外孫(외손)이라 하여 康赫(강혁)과 振浩(진호) 氏(씨)로 하여금 七百里(칠백리)길을 달려와 序文(서문)을 請(청)하니 대개 우리 先祖(선조) 巖軒公(암헌공)이 雪齋(설재)의 家門(가문)에 장가 드니 우리 文忠公(문충공)은 그의 甥姪(생질)이다.

일찍 巖軒公(암헌공) 行狀(행장)을 閱覽(열람)하니 이르기를 살고 있는 金鞍洞(금안동) 에 오래된 괴목 나무가 있으니 이는 雪齋先生(설재선생)이 講學(강학)한 곳이다 하고 雪齋(설재)가 世子(세자)를 陪行(배행)하여 元(원)에 갔다가 돌아옴에 元帝(원제)가 金鞍(금안)과 白馬(백마)를 下賜(하사)하니 洞(동)의 이름이 이 때문이다.

巖軒(암헌)이 데릴사위로 이곳에서 살았으니 지금도 그 遺址(유지)가 아직도 있고 文忠公遺集(문충공유집) 에 鄭監司(정감사) 兄(형)에게 寄贈(기증)한다는 몇 首(수)와 鄭判書(정판서) 兄(형)을 輓(만)한다는 二首(2수)와 詩(시)가 있으니 監司(감사)와 判書(판서)는 모두 景武公(경무공)을 지적한 것이니 文忠公(문충공)에게는 內從兄弟(내종형제)가 된다.

當時(당시)에 상상해 볼 때 姻親戚好(인친척호)의 정의가 문득 한방과 같았고 지금 몇 百年(백년) 뒤에 佐模(좌모)가 外裔(외예)로써 이 족보에 이름을 남기니 어찌 우연 이리오. 드디어 사양치 않고 써서 돌여보내고 佐模(좌모) 이로 因(인)하여 가만히 한 말씀 우러러 아뢸 것이 있으니 鄭氏(정씨)가 近世(근세)에 비록 衰替(쇠체)하여 벼슬로 朝廷(조정)에 계신 분이 없으나 듣건데 여러 鄭氏(정씨)가 和順(화순)이며 咸平(함평)이며 務安(무안)같은데 산 것을 보니 그 수효가 심히 번창하였고 또 모두 孝悌(효제)를 敦行(돈행)하여 儒業(유업)을 닦으니 抱抱然(포포연)하여 君子人(군자인)이 많으니 어찌 雪齋(설재)의 碩德(석덕)과 後孫(후손)에게 流耀()하여 裒然()히 湖南八家(호남팔가)의 으뜸이 아님을 알리오.

다른 날 學政(학정)을 맡아 賢能(현능)에 오른자 쓰기를 雪齋(설재)의 後孫(후손) 아무게라고 한즉 外裔(외예)된자 어찌 더불어 光榮(광영)함이 있지 않으리오. 佐模(좌모) 바야흐로 옷길을 여미고 기다리노라.

                                           外裔吏曹參判 申佐模謹序

系譜 :   卷  

 

 

 

  파계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고(考)

 

 世 諱申佐模

本貫 德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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